뇌동맥류 수술 후 회복을 위해 엄마 집에 내려온 지 15일째, 밤새 내린 비가 농작물과 마음을 적셔 준 날이었다. 오늘은 비가 그친 산책길에서 금계국과 망초꽃으로 두 개의 푸놀치 얼굴을 만들고, 엄마의 말에서 농부의 지혜를 배웠다.
오늘은 회복 15일차다.
어젯밤에는 밤새 비가 내렸다.
빗소리에 잠을 조금 설쳤지만 생각보다 푹 잔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은 산책을 쉬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비를 맞으며 걷는 것이 조금은 귀찮기도 했다.
그래서 창밖만 바라보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조금 지나자 빗줄기가 잦아들었다.
나는 얼른 우산 하나를 챙겨 집을 나섰다.
비가 그친 산책길, 농작물들이 웃는 것 같았다
회복을 위해 시작한 아침 산책.
이제는 하루를 시작하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비가 내린 길은 촉촉했다.
공기는 습했고 조금은 후덥지근했다.
그래도 비를 머금은 풍경은 참 아름다웠다.
논도, 밭도, 길가의 풀들도 모두 오랜만에 실컷 물을 마신 얼굴 같았다.
농작물들이 활짝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제야 살겠다." 하며 기지개를 켜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여기저기에서 작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삶에도 단비 같은 순간이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우리 삶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다 보면 아무리 애를 써도 풀리지 않는 일들이 있다.
아무리 기다려도 답이 보이지 않는 시간도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단비가 내리듯 모든 것이 조금씩 풀리는 순간이 찾아온다.
조급하게 애쓰던 마음이 편안해지고, 막혀 있던 길이 열리기도 한다.
비를 맞은 농작물을 보며, 문득 사람의 삶도 자연과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계국과 망초꽃으로 만든 푸놀치 얼굴
오늘도 산책길에서 자연은 나에게 또 하나의 선물을 주었다.
금계국은 자기 몫을 다하고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노랗게 빛나던 꽃이 이제는 씨앗을 품고 조용히 자신의 시간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망초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나는 두 꽃을 바라보다 또 하나의 푸놀치를 해보고 싶어졌다.
먼저 금계국으로 머리를 표현해 보았다.
갈색으로 마른 꽃이 머리카락이 되었다.
그리고 망초꽃으로도 같은 얼굴을 만들어 보았다.
하얀 꽃송이가 풍성한 머리카락처럼 보였다.
두 작품을 나란히 놓고 바라보니 참 신기했다.
같은 얼굴인데 느낌이 전혀 달랐다.
- 하나는 삶을 충분히 살아낸 지혜로운 얼굴 같았고
- 또 하나는 싱그러운 미소를 가진 아이 같았다
사진을 찍으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오늘 작품은 정말 마음에 드는데?'
자연은 늘 같은 재료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 더 재미있다.
계절이 바뀌면 재료도 달라지고, 그날의 내 마음도 달라진다.
그래서 매일 다른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것 같다.
엄마가 말한 얌전한 비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엄마가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엄마는 창밖을 보며 말씀하셨다.
"그래도 비가 참 얌전하게 와서 신통하다."
처음에는 무슨 말씀인가 했다.
엄마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바람까지 불었으면 농작물이 다 쓰러졌을 텐데."
"비만 와서 참 다행이다."
나는 또 하나를 배웠다.
나는 비만 보았는데, 엄마는 비 뒤에 있는 농작물을 보고 계셨다.
나는 날씨를 보았는데, 엄마는 농부의 마음으로 하늘을 보고 계셨다.
같은 비를 보아도 바라보는 마음은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달콤한 단호박으로 채운 점심
점심은 며칠 전 지인께서 보내주신 단호박을 쪄 먹기로 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단호박을 한입 먹어보니 정말 달았다.
설탕을 넣은 것도 아닌데 자연이 만든 단맛이었다.
엄마도 한입 드시더니 말씀하셨다.
"참 달고 맛있다."
엄마가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니 괜히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배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채우는 일이라는 것을 다시 느꼈다.
회복 15일차, 오늘 내가 배운 것
오늘 하루를 돌아보니 비가 많은 것을 알려준 날이었다.
단비가 내리면 농작물이 살아나듯, 사람도 마음에 단비가 내리면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리고 자기 몫을 다한 꽃도 아름답고, 이제 막 피어난 꽃도 아름답다는 것을 자연이 가르쳐 주었다.
오늘은 회복 15일차.
비가 그친 산책길에서 두 개의 얼굴을 만들었고, 엄마의 한마디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지혜를 배웠으며, 달콤한 단호박 한 조각에서 또 하나의 행복을 만난 하루였다.
함께 생각해 보면 좋은 질문
- 내 삶에 단비처럼 찾아온 순간은 언제였을까?
- 나는 같은 상황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 오늘 나를 웃게 만든 작은 자연의 선물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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