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동맥류 수술 후 회복을 위해 엄마 집에 내려온 지 17일째, 폭우가 내린 아침과 엄마의 상추 이야기를 통해 마음속 쓴맛과 회복의 의미를 생각해 본 하루였다.
오늘은 회복 17일차다.
어제는 하루 종일 글도 쓰지 않고 쉬었다.
회복을 기록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기록보다 쉬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회복 17일차 이야기다.
새벽 4시 30분, 폭우 소리에 깬 아침
새벽 4시 30분쯤이었다.
창문을 조금 열어놓고 잠을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엄청난 빗소리가 들려왔다.
폭우였다.
비가 지붕을 때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잠이 번쩍 깼다.
순간 조금은 겁이 날 정도였다.
'비가 이렇게 많이 와도 괜찮은 걸까?'
한참을 그렇게 쏟아지던 비는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또다시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비를 맞고 하우스 문을 닫는 엄마
6시쯤 되자 엄마가 일어나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비를 맞으면서도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가셨다.
나는 창문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는 마당 한쪽에 있는 작은 하우스로 가더니 문을 닫고 계셨다.
아마 빗물이 안으로 들어갈까 봐 걱정되셨던 것 같다.
다시 집으로 들어오신 엄마는 창밖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하셨다.
"어제는 참 얌전하게 오더니."
"오늘은 바람이 너무 세네."
"비가 베란다 안까지 들어오잖아."
"오늘은 얌전하지 못하네."
그 말을 들으며 나도 웃음이 났다.
어제는 비를 보며 "얌전하다."고 하시더니, 오늘은 같은 비를 보며 "얌전하지 못하다."고 말씀하신다.
엄마에게 비도 하나의 생명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다.
천둥과 번개 뒤에 찾아온 강한 햇빛
비는 천둥과 번개까지 동반하며 한참을 퍼부었다.
그러다가 오전 10시쯤이 되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잠시 후에는 강한 햇빛이 쏟아졌다.
조금 전까지 폭우가 내리던 하늘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환한 날씨였다.
거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엄마의 꽃밭에는 나비들이 분주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 꽃 저 꽃을 오가며 쉬지 않고 날아다닌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꼭 서로 할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 같았다.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많을까?"
혼자 그런 생각을 하며 한참을 바라보았다.
비 오는 날 더 크게 들리는 엄마의 아이고 소리
오늘은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엄마의 "아이고." 소리가 유난히 많이 들렸다.
날씨가 궂으면 아픈 분들은 몸이 더 쑤신다고 하지 않는가.
엄마도 그러셨다.
아이고.
아이고.
그 소리가 하루 종일 이어졌다.
그런데도 엄마는 가만히 계시지 못하신다.
상추의 쓴맛을 빼는 엄마
텃밭에 있는 상추가 너무 자라 이제는 쇠었다고 하셨다.
"이제 그냥 두면 너무 써서 못 먹어."
그러면서도 먹을 수 있는 잎만 골라 잘라 오셨다.
그리고 삶아서 물에 담가 두셨다.
왜 물에 담가 놓느냐고 여쭤보니 엄마가 말씀하셨다.
"쓴물을 빼야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문득 내 마음도 돌아보게 되었다.
'나에게 있는 쓴물은 무엇일까?'
내 마음속 쓴물은 무엇일까
한참을 생각해 보았다.
아마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아닐까.
회복은 잘될까.
다시 예전처럼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을까.
앞으로의 삶은 어떻게 흘러갈까.
이런 걱정들이 내 마음속 쓴물이 되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상추는 물에 담가 놓으면 쓴맛이 빠진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무엇에 담가야 두려움과 걱정이 빠질까.
아마도 시간이 아닐까.
그리고 쉼.
자연.
사람들과의 따뜻한 대화.
그런 것들이 마음속 쓴맛을 조금씩 빼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에서 쓴내가 난다는 말
오늘은 엄마와 유난히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그러다 엄마가 예전에 자주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입에서 쓴내가 난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엄마는 웃으며 설명하셨다.
"사람하고 말을 안 하니까 입에서 쓴내가 나는 거야."
엄마는 동네 사람들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하셨다.
"죽은 사람도 별로 없는데 예전처럼 잘 안 모이고 잘 안 놀아."
그 말씀을 들으며 나도 이해가 되었다.
나이가 들면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움직이는 것이 귀찮아진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을 만나는 일도 줄어드는 것이다.
그런데 엄마 말씀을 듣고 보니 사람은 몸만 움직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와 안부를 묻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도 건강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말이다.
회복 17일차, 오늘 내가 배운 것
오늘은 특별한 일을 한 것은 없었다.
폭우를 보고, 나비를 바라보고, 엄마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그 어느 날보다 많이 움직인 하루였다.
오늘은 회복 17일차.
엄마는 상추의 쓴맛을 빼기 위해 물에 담가 두셨고, 나는 내 마음의 쓴맛은 무엇인지 오래 생각해 본 하루였다.
어쩌면 회복이란 몸이 건강해지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속 쓴맛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함께 생각해 보면 좋은 질문
-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쓴물은 무엇일까?
- 나는 두려움과 걱정을 무엇에 담가 조금씩 덜어내고 있을까?
- 오늘 나에게 마음을 움직이게 한 대화는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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