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 21일차, 혼자 버스를 타고 나가 다시 어린아이가 된 하루

뇌동맥류 수술 후 회복을 위해 엄마 집에 내려온 지 21일째, 오늘은 몽환적인 물안개와 잘 자란 들깨를 바라보고 혼자 버스를 타고 마트와 도서관을 다녀왔다. 평범한 외출이 설렘이 되고, 작은 일상이 회복이 된 하루였다.

오늘은 회복 21일차다.

오늘도 아침 6시쯤 일어나 평소처럼 아침 산책을 나섰다.

어제 내린 비로 생긴 기온 차 때문인지 여기저기 안개가 보였다.

아침부터 공기는 후덥지근했지만, 멀리 보이는 안개가 참 아름다웠다.

그 모습을 보니 매일 산책길에서 만나는 물안개를 빨리 보고 싶어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아침 산책길에서 만난 몽환적인 물안개

내가 예상한 것처럼 오늘의 물안개는 정말 몽환적이었다.

개울 위로 부드럽게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저 멀리 산에서도 안개가 조금씩 위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매일 비슷한 길을 걷지만 날씨와 시간에 따라 전혀 다른 풍경을 만난다.

그래서 아침 산책은 지루하지 않다.

오늘은 어떤 풍경을 만나게 될지 기대하며 걷는 일이 내 하루의 작은 즐거움이 되었다.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들깨를 보며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방문을 살며시 열어보니 엄마는 깊이 주무시고 계셨다.

내가 아침 산책을 나갈 때만 해도 엄마는 들깨밭에 계셨다.

엄마는 들깨 사이에 난 풀을 뽑고, 죽은 들깨가 있는 자리에는 새로운 들깨 모를 다시 심으셨다고 한다.

새벽부터 밭일을 하셔서인지 계속 불러도 모르고 깊이 주무셨다.

조금만 움직이셔도 너무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보면 엄마의 체력이 한 해 한 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 마음이 아프다.

그런데 처음 이곳에 내려와 함께 심었던 들깨 모가 건강하게 잘 자라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흐뭇해진다.

마치 내가 대단한 일이라도 해낸 것처럼 뿌듯하고 만족스럽다.

사실 나는 화초를 잘 키우지 못한다.

우리 집에 화초를 사다 놓으면 몇 달 만에 시들 때도 있고, 오래 살아도 1년 정도 지나면 죽이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그런 내가 심은 들깨가 비와 바람을 견디며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물론 대부분은 엄마가 다시 손보고 돌봐주신 덕분일 것이다.

그래도 내가 처음 모종을 나누고 흙에 심었다는 이유만으로 자꾸 내 들깨처럼 느껴진다.

들깨가 조금씩 뿌리를 내리듯 나도 이곳에서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조금씩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 이유 없이 마트에 가고 싶었던 날

오늘은 9시 버스를 타고 마트에 다녀오겠다고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는 왜 가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왜 가려고?"

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냥."

꼭 필요한 일이 있어서라기보다 며칠 만에 조금 멀리 나가보고 싶었다.

준비하면서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가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시장에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설레었다.

평소에 보지 못했던 물건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했다.

오늘의 내가 그때의 아이와 조금 비슷했다.

며칠 만에 버스를 타고 나간다는 사실만으로 설레는 내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내가 조금 어려진 것 같기도 했다.


승객이 거의 없는 500원 시골 버스

버스는 정해진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버스에 올라보니 승객은 나 혼자였다.

한참을 달린 후에야 남자 어르신 두 분이 탑승하셨다.

오늘은 장날도 아니고 주말이라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이 더 적은 것 같았다.

사람이 거의 없는 버스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천천히 이동하는 시간도 나쁘지 않았다.

급하게 도착해야 할 곳도 없고, 서둘러 처리해야 할 일도 없었다.

그저 버스의 속도에 나를 맡기고 가면 되는 시간이었다.


11시 버스를 기다리며 도서관으로

은행에서 처리할 일을 마쳤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는 오전 11시에 있었다.

버스 요금은 500원이지만 택시를 타면 7,000원 정도가 든다.

차이가 너무 크기도 했고, 남은 시간을 보내기에는 도서관이 가장 좋은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동화책에 관심이 많아 어린이 자료실로 갔다.

여러 권의 동화책을 꺼내 한 권씩 읽었다.

한참 책을 읽고 있는데 어린아이 두 명이 자료실로 들어왔다.

책을 빌리러 온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아이들이 나를 보더니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만난 어른에게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참 귀여웠다.

나도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잠깐의 인사였지만 마음이 환해지는 시간이었다.


로컬푸드 매대를 구경하는 재미

버스 시간이 가까워져 이번 외출의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마트로 향했다.

마트에 들어가 로컬푸드 매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 고구마순
  • 호박잎
  • 오이
  • 애호박
  • 옥수수

익숙한 농산물인데도 마트 진열대에 놓인 모습을 보니 새롭게 느껴졌다.

'이런 것도 판매하는구나.'

하나하나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마트에는 생각보다 손님도 많았다.

근처에 수목원과 개울, 휴양림이 있어 놀러 온 사람들이 들어가기 전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엄마가 잘 드시는 아삭이고추와 섬유유연제, 그리고 엄마가 맛있다고 했던 젤리 한 봉지를 구입했다.


가장 중요한 쓰레기봉투를 잊었다

마트에서 계산을 마치고 나오다가 가장 중요한 쓰레기봉투를 사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결국 조금 더 걸어 편의점으로 갔다.

편의점에서 쓰레기봉투를 구입하고 나니 짐이 제법 무거워졌다.

잠시 편의점에 짐을 맡겨놓고 커피를 사러 다녀왔다.

차가운 커피 한 잔을 들고 터미널로 향했다.

혼자 장을 보고, 필요한 것을 챙기고, 버스를 기다리는 평범한 과정도 오늘은 하나의 작은 여행처럼 느껴졌다.


터미널의 어르신들을 보며 엄마를 떠올렸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어르신들이 많이 계셨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분들이 있어서인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목소리가 조금 높았다.

누군가 한마디를 하면 다른 분이 더 큰 목소리로 대답하셨다.

그 모습이 조금 웃기기도 했지만 자연스럽게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도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질 때가 있다.

어르신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웃음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쓰였다.

나이가 들며 달라지는 모습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자연스러운 과정일 것이다.


옥수수를 먹으며 엄마와 나눈 이야기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니 엄마가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점심은 옥수수를 쪄서 먹기로 했다.

막 쪄낸 옥수수를 함께 먹었다.

날씨가 너무 더워 에어컨을 켜놓고 엄마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멀리 다녀온 것도 아닌데 집에 돌아와 엄마 얼굴을 보니 괜히 반가웠다.

내가 사 온 아삭이고추와 젤리를 보며 엄마가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니 외출한 보람도 느껴졌다.


수박을 먹으러 회관으로 간 엄마

조금 뒤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집으로 오셨다.

"수박 먹자."

엄마는 수박을 함께 먹기 위해 다른 날보다 조금 일찍 회관으로 나가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너도 와서 수박 먹어."

안 갈 수가 없어 나도 회관으로 갔다.

어르신들은 둘러앉아 수박을 나누어 드시고 계셨다.

나도 수박 두 조각을 먹었다.

수박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아주머니들이 물으셨다.

"왜 벌써 가?"

나는 웃으며 인사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사람들과 더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회관에 남으셨다.

엄마에게 회관은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아니다.

사람을 만나고, 안부를 나누고, 웃으며 하루를 살아갈 힘을 채우는 곳이다.


회복 21일차, 평범한 하루가 설렘이 되었다

오늘은 혼자 버스를 타고 마트에 다녀왔다.

도서관에서 동화책을 읽었고, 처음 만난 아이들의 인사에 웃었다.

엄마가 좋아하는 아삭이고추와 젤리를 사 왔고, 회관에서는 어르신들과 수박을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처음 심었던 들깨가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을 보며 내가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낸 것처럼 뿌듯해했다.

들깨는 비와 바람을 견디며 자기 자리에서 자라고 있었다.

나도 서두르지 않고 내 자리에서 조금씩 회복하고 있다.

오늘의 회복은 특별한 치료가 아니었다. 평범한 하루를 설레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그 안에서 작은 기쁨을 발견하는 일이 나를 조금씩 회복시키고 있었다.


함께 생각해 보면 좋은 질문

  • 평범한 외출이 특별한 설렘으로 느껴졌던 때가 있었을까?
  • 최근 내가 잘 자라고 있다고 느낀 부분은 무엇일까?
  • 오늘 나를 웃게 만든 작고 소중한 장면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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