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동안 채채와 홍이의 감기가 조금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마친 뒤 딸과 함께 병원을 찾았습니다.
저는 비염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비염이 딸에게, 또 손녀딸들에게도 이어진 것 같습니다. 꽃가루가 날리거나 기온이 조금만 달라져도 아이들은 쉽게 콧물을 훌쩍이고 감기에 걸립니다.
하지만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비염의 유전이 아닙니다. 오늘 제 마음에 오래 남은 장면은 병원 진료가 끝난 뒤, 약국 앞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약국에 가기 전, 우리는 약속을 했습니다
며칠 전 병원에 왔을 때는 손녀딸들이 사고 싶어 하던 작은 물건을 하나 사주었습니다. 약국에는 아이들의 눈길을 끄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작고 귀엽고 알록달록한 것들이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놓여 있지요.
그런데 오늘은 병원에 오기 전부터 약속을 했습니다.
“오늘은 아무것도 사지 않는 날이야.”
아이들과 한 약속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어른인 저와 딸이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기도 했습니다. 아이가 조르면 마음이 약해질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약국에 들어갔습니다.
“그냥 구경만 할게.” 아이의 마음이 보였습니다
약국에 들어가자마자 손녀딸들은 자연스럽게 아이들 물건이 있는 매대로 향했습니다. 저와 딸은 바로 말했습니다.
“안 돼. 오늘은 안 사기로 했잖아.”
그러자 손녀딸은 말했습니다.
“그냥 구경만 할게.”
쪼그려 앉아 물건들을 바라보는 손녀딸의 뒷모습을 보는데 마음이 살짝 흔들렸습니다. 얼마나 사고 싶을까. 얼마나 갖고 싶을까.
그래도 오늘은 약속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사지 않고 약국을 나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는 없다는 말
약국을 나오며 손녀딸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 수는 없어.
때로는 하고 싶어도 기다릴 줄 알아야 해.”
아이가 그 말을 다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이가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이런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감정은 허용해주되, 모든 행동을 허용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갖고 싶은 마음은 괜찮습니다. 속상한 마음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는 경험도 아이에게는 중요한 배움이 됩니다.
신호등 앞에서 다시 터진 아이의 마음
신호등을 건너야 해서 손녀딸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말했습니다.
“할머니 손 너무 세게 잡았어. 팔 아파. 놔.”
아마 정말 손이 세게 느껴졌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약국에서부터 이어진 속상함이 함께 들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신호등을 건너면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 돼.
그런데 지금은 위험하니까 손을 잡아야 해.”
신호등을 건넌 뒤 아이는 도로 옆 나무 뒤로 숨었습니다. 아마 자기 마음대로 가도 된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모르는 딸은 그냥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그 순간 아이의 마음이 터졌습니다.
“내 마음대로 가도 된다면서 왜 안 와!”
아이의 화 속에는 오해와 서운함이 있었습니다
어른이 보기에는 별일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달랐을 것입니다.
갖고 싶은 것을 참고, 약속을 지키고, 손도 잡고, 이제야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엄마와 할머니가 자기 마음을 따라와 주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딸은 상황을 듣고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디로 가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삐친 아이는 앞으로 뛰어가 버렸습니다.
우리 어른들도 이렇게 반응할 때가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어른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요.
기대했던 대로 되지 않을 때, 내 마음이 전달되지 않았다고 느낄 때, 우리는 여러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 상대 탓을 하기도 하고
- 내가 또 잘못했다고 자기비판을 하기도 하고
- 말을 닫아버리기도 하고
- 어떻게든 풀 방법을 찾아보기도 합니다
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는 아직 감정을 말로 정리하는 힘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울기도 하고, 숨기도 하고, 뛰어가기도 합니다.
채채가 찾아낸 자기만의 감정 회복 방법
앞으로 뛰어가던 채채가 갑자기 물었습니다.
“누가 일등이야?”
저는 얼른 대답했습니다.
“와우, 채채 진짜 잘 달리네. 채채가 일등이네!”
그 말에 아이의 마음이 스르르 풀렸습니다. 조금 전까지 속상해서 뛰어가던 아이가 다시 웃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웃으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마 채채는 그 작은 머리로 많은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 마음을 풀 방법을 찾아낸 것 같습니다.
그 방법이 옳고 그른지를 따지기 전에, 저는 아이가 스스로 감정을 전환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참 기특했습니다.
아이의 감정은 가르치기보다 함께 지나가야 합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참 많은 순간을 만납니다. 약속을 지켜야 하는 순간도 있고, 아이의 속상함을 받아줘야 하는 순간도 있습니다.
무조건 들어주는 것도 답은 아니고, 무조건 막는 것도 답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느끼는 감정을 알아차려주는 일입니다.
“갖고 싶었구나.”
“속상했구나.”
“기다리는 게 어려웠구나.”
“그래도 오늘 약속을 지켜냈네.”
이런 말들이 아이 마음 안에 작은 힘으로 쌓이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아이에게 배웁니다
오늘 약국 앞에서 저는 다시 배웠습니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참고 있고, 생각보다 많은 감정을 느끼고 있으며, 생각보다 열심히 자기 마음을 조절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을요.
어른의 역할은 아이의 감정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함께 지나가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채채는 갖고 싶은 마음을 참았고, 속상한 마음을 표현했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시 웃음을 찾아냈습니다.
그 작은 과정이 아이에게는 아주 큰 성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할머니는 손녀딸을 보며 배웁니다. 아이의 마음은 작지 않다는 것을요. 작은 몸 안에도 아주 깊은 감정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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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질문
오늘 아이가 갑자기 화를 냈다면, 그 행동만 보기보다 그 안에 숨어 있는 마음을 한 번 바라봐 주세요.
어쩌면 아이는 말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내 마음도 조금만 알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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