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은 지나쳤지만 아이는 멈춰 섰습니다

죽은 지렁이 한 마리와 익어가는 딸기 하나가 아이에게는 세상을 배우는 특별한 순간이 되었습니다.

며칠 동안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락가락했다.

그러는 사이 지렁이들이 땅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지 못했는지, 길가 여기저기에서 삶을 마감한 모습이 보였다.

어른들은 그런 모습을 보면 대체로 그냥 지나간다.

“아, 지렁이가 죽었네.”

그 정도로 끝난다.

그런데 아이들은 다르다.

“엄마, 지렁이가 피를 흘리고 죽었어요!”

채채가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죽은 지렁이를 발견하고는 엄청 놀랐다고 한다.

“엄마, 이것 보세요!”

“지렁이에요!”

“지렁이가 피를 흘리고 죽었어요. 어떡해요?”

아이에게는 그 장면이 정말 큰 사건이었던 모양이다.

다음 날 딸이 채채를 하원하러 간다고 해서 나도 함께 마중을 나갔다. 그런데 채채는 전날 본 지렁이가 계속 생각났는지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할머니, 빨리 가요. 저기에 지렁이가 죽어 있어요.”

그래서 채채와 나는 지렁이가 있는 곳으로 갔다.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바라보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아이에게는 별일이 아니라 큰일입니다

그날 홍이는 엄마와 먼저 집으로 들어갔다.

아마 채채가 집에 가서 지렁이를 본 이야기를 자랑처럼 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다음 날 아침, 홍이는 눈을 뜨자마자 자기도 그 지렁이를 보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결국 등원길에 두 아이는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 지렁이를 바라보았다.

어른 눈에는 별것 아닌 일이다.

그냥 죽은 지렁이 한 마리다.

하지만 아이들 눈에는 다르다.

죽음도 처음이고, 생명의 모습도 처음이고, 땅 위에 나온 지렁이도 너무 신기하다.

아이들은 지금 세상을 처음 배우는 중이다.

딸기 하나도 아이에게는 놀라운 발견입니다

하원길에 또 다른 곳에서 지렁이를 만났다.

이제는 엄마도 함께 앉아서 보라고 한다.

그렇게 지렁이를 보고 난 뒤, 아이들은 아파트 주변을 돌다가 딸기를 심어 놓은 화분 앞에 멈춰 섰다.

초록색 딸기, 하얗게 익어가는 딸기, 빨갛게 물들어가는 딸기를 보며 아이들은 또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건 아직 안 익었네.”

“이건 빨개졌어요.”

아이들의 눈에는 모든 것이 새롭다.

우리는 너무 익숙해서 지나치는 것들을 아이들은 멈춰 서서 바라본다.

아이는 지금 이 순간만 봅니다

아이들 눈에는 엄마의 바쁜 출근 시간도 없다.

빨리 집에 들어가서 해야 할 일도 없다.

저녁 준비도, 빨래도, 내일 일정도 아직 아이의 마음에는 없다.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눈앞에 있는 지렁이고, 딸기고, 자기가 발견한 것을 엄마와 함께 보는 일이다.

그래서 아이는 자꾸 부른다.

“엄마, 이것 봐요.”

“할머니, 빨리 와봐요.”

“신기하지요?”

아이가 원하는 것은 설명이 아닐 때가 많다.

그저 같이 봐주는 것.

같이 놀라주는 것.

같이 신기해해 주는 것이다.

부모의 마음 상태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를 바꿉니다

마음에 여유가 있는 날에는 아이 옆에 함께 앉을 수 있다.

“우와, 정말 신기하네.”

“그래서 네가 놀랐구나.”

“딸기가 이렇게 익어가고 있네.”

이렇게 말해줄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이 지쳐 있는 날에는 같은 상황도 다르게 보인다.

“그만 가자.”

“별것 아니야.”

“빨리 집에 들어가야지.”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먼저 나올 수 있다.

상황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달라진 것이다.

부모가 편안해야 아이의 호기심도 받아줄 수 있습니다

부모교육이나 부모상담을 할 때 나는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어머님이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합니다.”

“아버님이 편안해야 아이도 편안합니다.”

이 말을 들으면 부모님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제가 불행하다는 말인가요?”

“제가 뭘 잘못했다는 건가요?”

“저에 대해 뭘 아신다고 그렇게 말씀하세요?”

그런 뜻은 아니다.

부모도 사람이다.

부모도 지치고, 힘들고, 여유가 없을 때가 있다.

다만 부모의 마음이 지쳐 있으면 아이의 호기심을 받아줄 힘도 함께 줄어든다.

그래서 부모의 마음을 돌보는 일은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한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아이 옆에 잠시 함께 앉아주는 일

이틀 동안 지렁이를 바라보는 손녀들을 보며 내 부모의 자리와 딸의 부모 자리를 생각했다.

아이를 잘 키운다는 것은 꼭 거창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가끔은 아이가 쪼그리고 앉은 그 자리에 함께 앉아주는 것.

아이가 발견한 작은 세상을 함께 바라봐 주는 것.

그리고 이렇게 말해주는 것.

“정말 신기하네.”

“그래서 네가 많이 놀랐구나.”

“할머니도 같이 보니까 새롭다.”

어쩌면 아이들은 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함께 세상을 바라봐 줄 사람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무리하며

어른은 지나쳤지만 아이는 멈춰 섰다.

죽은 지렁이 앞에서도, 익어가는 딸기 앞에서도 아이는 세상을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함께 앉아주는 어른이 있을 때, 아이의 호기심은 더 따뜻한 기억이 된다.

오늘 아이가 멈춰 선 자리가 있다면 잠시 함께 앉아보면 좋겠다.

그곳에 아이의 마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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