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동맥류 수술 후 회복을 위해 엄마의 시골집에서 지낸 지 36일째입니다. 7월의 마지막 주말, 조용한 마을에서 아이스커피 한 잔의 행복을 느끼고 마을회관의 에어컨과 선풍기를 살펴드렸습니다. 휴대폰 기능부터 전자제품 사용까지 도와드리다 보니 어느새 저는 어르신들이 무언가 불편할 때 찾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7월의 마지막 주말, 방학을 맞아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7월의 마지막 주말인 것 같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여름휴가가 시작되고, 아이들의 방학도 시작되는 시기입니다.
평소 우리 동네에서는 아이들의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가끔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아다니는 아이들이 눈에 띕니다.
아마 방학을 맞아 할머니 댁이나 증조할머니 댁에 놀러 온 아이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다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왜 할아버지 댁이나 증조할아버지 댁보다
할머니 댁과 증조할머니 댁이라는 말이 먼저 떠오를까요?
제가 여자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이 동네에는 할아버지보다 할머니들이 더 많이 생활하고 계시기 때문일까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여름방학과 시골집을 떠올리면 할머니의 얼굴과 부엌, 마당과 장독대가 자연스럽게 먼저 생각납니다.
적막한 마을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
휴일이라 그런지 오늘은 다른 날보다 동네가 더욱 조용했습니다.
정말 적막강산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사람의 움직임도, 자동차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늘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간혹 황새가 날아가고, 이름은 알 수 없지만 까마귀나 까치 정도 크기의 새들이 천천히 하늘을 가로질렀습니다.
새가 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도 함께 느려집니다.
무엇을 서둘러야 할 이유도 없고, 지금 당장 해내야 할 일도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나에게 이런 시간이 주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움과 감사함이 절로 올라왔습니다.
회복하기 위해 시골에 내려왔지만 이곳에서 제가 얻고 있는 것은 단순한 휴식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늘을 천천히 바라보는 여유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음을 조금씩 배우고 있습니다.
요즘 나에게 아이스커피 한 잔은 작은 행복입니다
오늘은 모처럼 커피도 사다 마셨습니다.
엄마 집에는 얼음을 얼릴 수 있는 용기가 없습니다.
냉동실 안에는 엄마가 넣어두신 음식들이 가득해서 얼음을 얼릴 공간을 만들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요즘 저에게 아이스커피를 마실 기회는 생각보다 귀합니다.
밖에서 사 온 차가운 커피 한 잔이 별것 아닌 일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에게는 이런 작은 일이 또 하나의 행복입니다.
시원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여름 더위도 잠시 멀어지는 듯했습니다.
회복하면서 달라진 것 중 하나는
일상 속 작은 기쁨을 더 빨리 알아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심심해진 엄마는 결국 마을회관으로 가셨습니다
휴일이라 저도 느긋하게 늘어져 있었습니다.
더위에 몸도 무겁고,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없어 방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너무 심심하셨는지 밖에 한번 나가보겠다며 집을 나서셨습니다.
한참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으셨습니다.
회관에 누군가 있었나 보다 생각하고 있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회관에 에어컨이 시원한 바람이 안 나와.
한번 와서 봐줘.”
얼마 전 엄마와 어르신들에게 에어컨 희망온도를 조절하는 방법을 알려드린 적이 있습니다.
다시 헷갈리신 것인지, 실제로 시원한 바람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바로 일어나 마을회관으로 갔습니다.
에어컨 온도를 조절하고 집에 오려는데 밥을 먹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회관에 도착해 에어컨을 확인해보니 바람이 생각만큼 시원하지 않았습니다.
희망온도를 조금 더 낮추고 바람 세기도 강하게 조절해드렸습니다.
잠시 뒤 시원한 바람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어르신들이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있다가 밥 먹으러 와.”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오늘은 정말 먹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즘 시골에 내려와 너무 잘 먹고 있습니다. 이대로 계속 먹다가는 정말 굴러다니게 생겼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회관에서 밥을 먹지 않고 집에서 쉬려고 했습니다.
부녀회장님이 사 온 불낙전골 때문에 다시 회관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정말 조금 있다가 엄마에게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부녀회장님이 불낙전골을 사 왔어.
끓였으니까 얼른 건너와.”
첫 번째 권유는 사양할 수 있어도 두 번째 전화까지 받고 나니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다시 회관으로 갔습니다.
시골에서 누군가 음식을 준비하고 함께 먹자고 부르는 일은 단순히 밥을 먹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배가 고프지 않아도 그 자리에 함께 앉는 일이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선풍기가 고장 났다고 했습니다
회관에 도착하니 이번에는 선풍기가 작동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코드를 뽑았다가 다시 꽂아도 돌아가지 않는다며 선풍기가 고장 난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선풍기 코드를 뽑아 다른 콘센트에 연결해보았습니다.
그러자 선풍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잘 돌아갔습니다.
선풍기가 고장 난 것이 아니라 처음 연결했던 콘센트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전원을 확인하고 설정을 살펴보거나 다른 콘센트에 연결해보는 작은 과정만으로 해결되는 일도 많습니다.
하지만 어르신들에게는 전자제품이 작동하지 않는 순간 어디부터 확인해야 하는지 알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고구마순김치와 참외가 들어오며 회관 밥상이 풍성해졌습니다
처음에는 엄마와 앞집 아주머니만 회관에 계셨습니다.
조금 있으니 두 분의 아주머니가 더 들어오셨습니다.
한 분은 고구마순김치를 담가 오셨고, 또 다른 한 분은 밭에서 직접 땄다며 참외를 열 개쯤 들고 들어오셨습니다.
누가 먼저 가져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각자 집에 있는 음식을 자연스럽게 들고 오셨습니다.
고구마순김치와 참외, 불낙전골이 한자리에 놓였습니다.
이렇게 서로 나누어 먹는 모습이 참 정겨웠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집에 있는 음식을 혼자 먹기에는 많으니
회관에 가져와 함께 나누시는 것은 아닐까?
제가 너무 비약적으로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자서는 다 먹기 어려운 음식도 여러 사람이 함께 나누면 남기지 않고 먹을 수 있습니다.
음식을 나누면서 대화가 생기고, 웃음이 생기며, 혼자 있는 시간도 줄어듭니다.
어쩌면 시골의 음식 나눔은
먹을 것을 나누면서 외로움도 함께 덜어내는 방식인지 모릅니다.
어느새 마을 어르신들의 작은 해결사가 되었습니다
요즘 저는 이 동네에서 무언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한 번쯤 불러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지 않을 때도 저를 부르고, 선풍기가 돌아가지 않을 때도 저를 찾습니다.
휴대폰 화면이나 기능이 평소와 다를 때도 물어보십니다.
전화를 걸고 받는 기본적인 기능은 익숙하시지만 설정이 바뀌거나 낯선 알림이 뜨면 당황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진이 어디로 갔는지, 글씨가 왜 작아졌는지, 소리가 왜 나지 않는지, 화면이 왜 달라졌는지 하나씩 살펴봐드리기도 합니다.
간혹 간호봉사를 오시는 분이 부탁하는 일이 있으면 그것도 도와드릴 때가 있습니다.
제가 대단한 기술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희망온도를 낮추고 바람 세기를 조절하거나, 선풍기를 다른 콘센트에 연결해보고, 휴대폰 설정을 하나씩 확인하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어르신들에게는 사소해 보이는 기능 하나도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농촌 어르신들의 디지털 격차를 가까이에서 보게 됩니다
전자제품과 휴대폰은 점점 편리해지고 있지만 사용하는 방법은 오히려 더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가까이에 물어볼 사람이 없다면 작은 문제도 일상의 큰 불편이 됩니다.
이것이 현재 농촌에서 살아가는 어르신들의 현실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도시에 있을 때는 휴대폰이나 전자제품 사용이 어려운 어르신들의 문제를 뉴스나 이야기로만 접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머물면서 그 불편을 가까이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화면을 몇 번 누르면 해결되는 일이 어르신들에게는 어디를 눌러야 할지 몰라 시작조차 어려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기능이 많아질수록 편리해지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기기 사용에서 더 멀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특히 젊은 가족과 멀리 떨어져 생활하는 농촌 어르신들은 문제가 생겨도 바로 물어볼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디지털 격차는 기계를 다루는 능력의 차이만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천천히 알려줄 사람이 있는가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한 번 알려드렸다고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다음에 같은 상황이 생기면 다시 헷갈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전에 알려드렸잖아요”라고 말하기보다 다시 한번 천천히 알려드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도 배우고 있습니다.
회복하러 온 사람이 조금씩 다른 사람을 돕고 있습니다
처음 시골에 내려왔을 때 저는 오롯이 제 몸을 회복하기 위해 왔습니다.
쉬어야 했고, 몸의 신호를 살펴야 했으며, 무리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넘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제 역할도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엄마와 함께 밭일을 하고, 음식을 만들고, 마을 어르신들의 전자제품과 휴대폰을 살펴봅니다.
처음에는 낯설기만 했던 이곳에서 이제는 누군가 저를 찾고 있습니다.
도움을 받기 위해 내려온 사람이 조금씩 다른 사람을 돕고 있습니다.
그 사실이 제게도 힘이 됩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몸이 힘든 날에는 쉬어야 합니다.
모든 부탁을 다 들어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작은 불편을 함께 해결하는 일은 제 회복에도 긍정적인 힘을 주는 것 같습니다.
조금씩 시골 아줌마가 되어가는 중입니다
요즘의 제 모습을 보면 조금 웃음이 납니다.
에어컨을 봐드리고, 선풍기를 확인하고, 휴대폰 기능을 살펴보며 어르신들의 부탁을 들어드립니다.
마을회관에 가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아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듣습니다.
저도 어느새 이 마을의 생활에 완전히 적응해가는 시골 아줌마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부정적인 의미로 쓰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곳의 생활 방식과 관계 속으로 조금씩 들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불편해하는지 알게 되고,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챙기는지 보게 되며, 농촌에서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가까이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시골에서의 이 시간은 저에게 몸의 회복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회복은 사람들 사이에 다시 나의 자리를 만드는 일입니다
한 달 전만 해도 저는 이곳에 쉬러 온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회관의 에어컨이 시원하지 않으면 찾아가고, 선풍기가 돌아가지 않으면 콘센트를 확인합니다.
휴대폰 기능이 어려우면 어르신과 함께 화면을 들여다봅니다.
어르신들에게는 작은 불편을 물어볼 사람이 생겼고, 저에게는 아직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시간이 생겼습니다.
회복은 몸의 증상이 줄어드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그 관계 속에서 다시 나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저는 이 마을에서 새로운 것을 배웠습니다.
사람은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누군가는 음식을 가져오고, 누군가는 전자제품을 살펴보고, 또 누군가는 말벗이 되어주며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간다는 것입니다.
회복은 혼자 힘을 되찾는 일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연결되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회복 36일차, 오늘도 이 마을에 조금 더 스며들었습니다
오늘은 아이스커피 한 잔의 행복을 느끼고, 마을회관의 에어컨과 선풍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어르신들과 불낙전골을 먹고, 고구마순김치와 참외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느새 이 마을에서 누군가의 작은 불편을 함께 해결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시골에 내려온 처음에는 제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 일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고, 작은 일이라도 도우며, 관계 속에서 저의 새로운 자리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간이 제게 많은 것을 알게 해주어 고맙고 감사합니다.
회복 36일차.
오늘도 저는 조용한 시골 마을에 조금 더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습니다.
오늘의 한 줄
회복은 다시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사람들 사이에 나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함께 생각해 보면 좋은 질문
- 내가 당연하게 사용하는 휴대폰 기능이 누군가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닐까요?
- 주변 어르신들이 전자제품이나 휴대폰 사용에 불편을 겪고 있지는 않나요?
- 가까운 사람에게 천천히 다시 알려주는 여유를 가지고 있나요?
- 나는 지금 어떤 관계 속에서 나의 자리를 만들어가고 있나요?
- 오늘 내가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작은 도움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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