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세 엄마는 자연을 읽고 계십니다」
19년 상담사가 엄마에게 다시 배우는 사람과 삶의 이야기
엄마는 하루 중 많은 시간을 텔레비전 앞에서 보내십니다.
예전에 방송했던 드라마를 다시 보여주는 채널을 돌려가며 보시는데, 이미 여러 번 본 드라마도 처음처럼 집중해서 바라보십니다.
“엄마, 이거 저번에도 본 거잖아. 그런데 왜 그렇게 집중해서 봐?”
“드문드문 생각이 나니까 보지. 다 기억나는 것은 아니야.”
엄마의 대답을 듣고 웃으며 나도 옆에 앉았습니다. 예전에 본 드라마지만 엄마와 함께 보면 새롭게 보이는 장면도 있습니다.
가끔 앞집 아주머니가 놀러 오시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엄마에게 한마디 하십니다.
“아이고, 그놈의 드라마 좀 그만 봐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이웃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두 분의 생활 방식은 참 다릅니다.
글의 순서
드라마를 보는 엄마와 논밭을 누비는 아주머니
앞집 아주머니는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습니다.
내가 아침 산책을 나가면 철쭉 꽃밭에 물을 대거나, 농약통을 메고 고추밭과 논두렁을 오가는 아주머니를 자주 만납니다. 집에 가만히 계시는 날이 있을까 싶을 만큼 늘 일을 하십니다.
반면 엄마는 대부분 집에서 지냅니다.
엄마도 젊은 시절에는 여섯 남매를 키우며 집안일과 농사일을 했고, 오랫동안 바느질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원래 허약한 체질인 데다 지금은 삭신이 많이 아픕니다. 조금만 무리해도 일주일을 고생하는 일이 예사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엄마가 더 이상 농사를 짓지 못하도록 논과 밭을 도지로 내놓았습니다. 다만 텃밭 하나는 남겨두었습니다.
엄마에게 텃밭은 채소를 얻는 곳만이 아닙니다. 몸이 허락하는 만큼 무언가를 돌보며 자신의 자리를 확인하는 공간입니다.
앞집 아주머니는 움직이며 자신의 하루를 지키고, 엄마는 몸을 쉬게 하면서 자신의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서로를 자기 기준으로 바라보는 두 사람
엄마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는 앞집 아주머니를 보며 안쓰러워합니다. 때로는 그렇게까지 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일을 하는지 몰라.”
반대로 앞집 아주머니의 눈에는 집에서 드라마를 보는 엄마가 답답해 보일 수 있습니다.
엄마는 ‘왜 저렇게까지 일을 할까’라고 생각하고, 아주머니는 ‘왜 저렇게 드라마만 볼까’라고 생각합니다. 두 분 모두 자신에게 익숙한 생활 방식을 기준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편안한 방식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나와 다른 행동을 보면 지나치거나 잘못된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움직이며 활력을 얻는 사람이 있고, 몸을 쉬게 해야 하루를 견딜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한쪽이 옳고 다른 쪽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엄마, 사람은 모두 자기만의 성향이 있어”
엄마가 앞집 아주머니의 생활을 못마땅하게 이야기할 때면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 사람은 모두 자기만의 성향이 있어. 엄마도 엄마만의 성향이 있잖아. 앞집 아주머니는 몸을 움직이고 일을 해야 마음이 편한 사람일 수 있어.”
엄마는 별다른 대답 없이 내 말을 듣습니다.
나는 조금 더 설명합니다.
“그분의 그런 모습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해야 해. 그래야 서로 오해도 줄고 스트레스도 덜 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어.”
다름을 이해한다는 것은 상대의 모든 행동에 동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몸이 상할 정도로 무리하면 걱정할 수 있고, 불편한 말에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행동 하나로 사람 전체를 판단하지 않는 것, 상대가 나와 같은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 것이 수용입니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라는 생각을
“저 사람에게는 저 방식이 편안할 수도 있겠구나”로 바꾸면
상대를 바라보는 마음도 조금은 부드러워집니다.
엄마를 이해시키려다 나를 돌아보았습니다
나는 19년 동안 상담하며 사람의 성향과 행동 뒤에 놓인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그래서 엄마에게도 앞집 아주머니의 다름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나 자신에게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앞집 아주머니의 성향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아주머니를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을까.
엄마의 마음에는 못마땅함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엄마는 몸이 약해 하고 싶은 만큼 일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쉼 없이 논밭을 다니는 아주머니가 부럽기도 하고, 저렇게 일하다 몸이 상할까 봐 안쓰럽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라고 말하기 전에 엄마의 마음부터 알아주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엄마 눈에는 아주머니가 저렇게까지 일하는 것이 힘들어 보이는구나. 엄마는 몸이 아프니까 더 걱정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아주머니에게는 일하는 것이 자신을 살아 있게 하는 방식일 수도 있어.”
상담은 누가 맞고 틀렸는지를 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 옆에 또 다른 해석을 놓아주는 일입니다.
서로 다른 채로 곁에 있는 관계
앞집 아주머니는 엄마에게 드라마를 그만 보라고 말하면서도 고구마순김치와 깻잎김치, 다슬기장조림을 만들어 가져다주십니다.
엄마도 아주머니가 며칠 동안 보이지 않으면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닌지 걱정합니다.
두 분은 서로의 생활 방식이 여전히 못마땅할 때도 있지만, 오랫동안 반찬을 나누고 안부를 살피며 이웃으로 살아왔습니다.
사람은 완전히 이해해야만 곁에 머무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관계란 상대를 나와 같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채로 곁에 있을 자리를 조금씩 내어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엄마는 예전에 본 드라마를 다시 보고 있습니다. 앞집 아주머니는 아마 논이나 밭 어딘가에서 일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여전히 다릅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다름을 어느 한쪽의 기준으로 설명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드라마를 보며 몸을 쉬게 하는 엄마의 하루도, 논밭을 오가며 활력을 얻는 앞집 아주머니의 하루도 각자가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바라보며 걱정하고 때로는 못마땅해하셨습니다.
저는 그 곁에서 사람마다 자기만의 성향과 삶의 방식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엄마를 이해시키려던 끝에, 수용이란 상대뿐 아니라 내가 가진 판단의 기준도 함께 돌아보는 일이라는 것을 다시 배우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나누고 싶은 마음
사람마다 몸의 조건과 성향, 살아가는 방식이 다릅니다. 관계를 편안하게 만드는 것은 상대를 내 방식대로 바꾸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수 있음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보라 강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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