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 33일차, 우리 집이 하루 동안 마을회관이 되었습니다

뇌동맥류 수술 후 회복을 위해 엄마의 시골집에서 지낸 지 33일째입니다. 오늘은 두 시간 동안 산책을 하고 돌아와 기운 없던 엄마와 아침을 먹었습니다. 목욕봉사, 단호박, 믹스커피, 마늘 까기와 이웃들의 방문까지 이어진 하루 속에서 몸은 밥을 먹고 살아나고 마음은 사람을 만나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시골의 햇살과 모기가 남긴 회복의 흔적

오늘은 하늘이 흐리기는 했지만 비가 내릴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산책 준비를 하며 오늘도 덥겠다는 생각부터 들었습니다.

시골에 내려와 한 달 넘게 지내다 보니 얼굴도, 팔도, 목도 제법 많이 탔습니다. 다리에는 모기에 여기저기 물린 자국과 긁은 상처도 남아 있습니다.

거울 속 모습을 보면 조금은 시골 사람처럼 변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 같으면 햇볕에 탄 피부와 모기 물린 자국이 신경 쓰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자연 속에서 걷고 움직이며 살아낸 흔적처럼 느껴집니다.

조금은 시골스럽고,
또 한편으로는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조금 웃겼습니다. 이 모습이 어린 시절의 나와 비슷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어린 시절의 제 모습은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신주머니를 흔들며 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제가 성장한 곳은 아주 작은 시골마을이었습니다. 학교까지 걸어 다니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신주머니를 손에 들고 흔들며 친구들과 장난을 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학교에 갔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동네에는 여자친구 두 명과 남자친구 두 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자친구들과 함께 학교에 갔던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여자친구들과 걸었던 장면은 비교적 많이 떠오릅니다.

우리 집이 동네 입구에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이 집에서 나올 시간에 맞춰 밖으로 나가 함께 학교에 갔던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매일 만나던 친구들이었지만 지금은 서로 연락하지 않고 지냅니다. 각자 먹고살기 바빴고, 사는 지역도 달라졌으며, 여러 사정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만남이 끊어진 것 같습니다.

사람은 멀어졌지만 함께 걷던 길의 기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늘 제가 다시 걷고 있는 이 길 어딘가에는 신주머니를 흔들던 어린 시절의 저도 함께 걷고 있는 듯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친구들은 멀어졌지만,
함께 걷던 길은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두 시간의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아침

오늘도 산책길에서 많은 자연물을 만났습니다. 풀과 나무, 꽃과 열매를 바라보며 걷다 보니 어느새 두 시간이 가까워졌습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엄마가 침대에 누워 계셨습니다. 평소보다 힘이 없어 보였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엄마, 왜 그래요?”

엄마가 힘없이 대답하셨습니다.

“모르겠어.
기운도 없고 힘도 없고 힘들어.”

걱정이 되었지만 우선 아침부터 드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알겠어. 엄마, 빨리 아침 먹자.”

그렇게 말하고 저는 텃밭으로 나갔습니다.


우리 텃밭의 화수분 같은 호박

텃밭에서 깻잎 여러 장을 땄습니다. 깻잎만 가지고 들어오려고 하는데 우리 텃밭의 화수분 같은 호박이 또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마치 저를 바라보며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도 데려가요.”

혹시 다른 호박도 있나 둘러보았지만 오늘은 그 호박 하나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호박을 따서 깻잎과 함께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깻잎과 매운 고추를 송송 썰어 넣고 계란말이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조금 얼큰한 맛을 좋아하기 때문에 계란말이에도 매운 고추를 넣는 편입니다.

제가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며 음식을 만들고 있으니 침대에 누워 계시던 엄마도 천천히 일어나 나오셨습니다.


“당이 떨어졌었나 봐”라는 엄마의 한마디

엄마는 아침밥을 드신 뒤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래도 당이 떨어졌었나 봐.
밥 먹으니까 말짱해.”

조금 전까지 기운이 없고 힘들다고 하시던 엄마가 밥을 드시고 말짱해졌다고 하시니 웃음이 나왔습니다.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엄마, 안마기 옆에 사탕도 있고 젤리도 있는데
하나 드시지 그랬어요.”

엄마는 웃으며 대답하셨습니다.

“그러게. 아무 생각도 안 났어.”

엄마의 그 말에 아침이 조금 즐거워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씀드렸습니다.

앞으로 갑자기 기운이 없고 힘이 빠질 때에는 그냥 누워만 있지 말고 가까이에 있는 사탕이나 젤리라도 먼저 드시라고 말입니다.


목욕봉사 오시는 분들에게 대접하고 싶은 엄마

엄마는 일주일에 한 번씩 목욕봉사를 받습니다. 오늘이 바로 목욕봉사를 받는 날이었습니다.

엄마는 목욕을 도와주러 오시는 분들에게 늘 무엇인가 작은 것이라도 대접하고 싶어 하십니다.

거창한 음식이 아니어도 집에 있는 과일이나 간식이라도 내어드려야 마음이 편한 듯합니다.

그래서 엄마가 목욕을 하시는 동안 저는 단호박을 삶았습니다. 부드럽고 든든해서 식사 대용으로도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목욕을 마친 엄마와 봉사 오신 분들이 방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잘 익은 단호박을 내어드리니 모두 맛있다며 잘 드셨습니다.

엄마도 단호박을 맛있게 드셨고, 봉사 오신 분들이 잘 드시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셨습니다.

도움을 받는 사람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마음을 돌려주고 싶어 합니다.

엄마에게 단호박은 단순한 간식이 아니었습니다.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작은 대접이었습니다.


믹스커피 한 잔에도 엄마의 기준이 있습니다

목욕봉사를 오신 분들이 돌아가시고 엄마는 점심을 드셨습니다. 식사를 마친 엄마가 믹스커피 한 잔을 부탁하셨습니다.

점심을 드신 뒤 믹스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은 엄마의 변하지 않는 하루 루틴입니다.

어제는 제가 다른 생각을 하며 커피를 탔는지 평소보다 물을 조금 많이 부었던 것 같습니다.

엄마는 커피를 한 모금 드시더니 말씀하셨습니다.

“싱거운데, 왜 그랬어?”

어제의 일을 기억하고 있던 저는 오늘은 물의 양을 신경 쓰며 조심스럽게 부었습니다.

커피를 한 모금 드신 엄마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간이 맞네.”

커피에 간이 맞는다는 엄마의 표현이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엄마의 표정에는 분명한 만족감이 있었습니다.

커피 한 잔을 맛있게 타드렸다는 것이 별것 아닌 일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익숙한 취향을 기억하고 맞춰주는 일도 작지만 분명한 돌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늘 까기 2차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커피를 마신 뒤에는 마늘 까기 2차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씩 마늘 껍질을 벗기며 일을 하고 있는데 창문 밖에서 누군가 안을 기웃거렸습니다.

동네에서는 그래도 조금 젊으신 아주머니였습니다. 그래도 올해 여든이라고 하십니다.

시골에서는 여든도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한다는 사실이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현관문을 열고 말씀드렸습니다.

“아주머니, 들어오세요.”

아주머니가 들어오시자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말씀하셨습니다.

“단호박 좀 드려.”

아침부터 삶아놓은 단호박은 목욕봉사를 오신 분들에게도 대접하고, 동네 아주머니에게도 대접하는 넉넉한 간식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우리 집이 작은 마을회관이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앞집 아주머니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엄마에게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가서 모셔올게.”

앞집으로 가서 아주머니를 모셔왔습니다. 그렇게 우리 집에는 엄마와 동네 아주머니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오늘은 우리 집이 작은 마을회관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엄마와 아주머니들은 옛날이야기를 나누고, 동네 사람들의 안부를 묻고, 서로의 아픈 곳과 건강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옆에서 마늘을 까며 엄마와 아주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특별한 프로그램도 없고, 멋진 차림의 음식도 없었습니다.

단호박 몇 조각과 서로의 이야기가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방 안에는 사람의 목소리가 있었고, 오래된 기억을 함께 나누는 웃음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모인 집은 공간이 넓지 않아도 따뜻합니다.
이야기가 오가는 순간, 평범한 방도 마을회관이 됩니다.


노년의 하루에 사람이 필요한 이유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이가 들면 혼자 있는 시간이 편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혼자 있는 것과 외로운 것은 다릅니다.

몸이 아파 멀리 나가지 못하고, 교통편이 많지 않으며, 함께 지내던 이웃도 하나둘 줄어드는 시골에서는 누군가 찾아와주는 일이 더욱 소중합니다.

창문을 기웃거리며 안을 살피던 아주머니도, 앞집에서 함께 나오신 아주머니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단순히 심심함을 달래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가 관계 속에 여전히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몸은 밥으로, 마음은 사람으로 회복됩니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니 음식과 사람이 계속 이어져 있었습니다.

기운 없던 엄마는 아침밥을 먹고 다시 힘을 찾았습니다. 목욕봉사를 오신 분들은 따뜻한 단호박을 드시며 웃으셨습니다. 엄마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믹스커피를 마시며 만족해하셨습니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단호박을 나누어 먹으며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결국 사람은 잘 먹어야 몸이 움직이고, 사람을 만나야 마음이 움직이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회복을 위해 시골에 내려온 사람은 저였지만, 엄마와 이웃들의 모습을 보면서 회복은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자주 배우게 됩니다.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커피의 물 양을 기억하고, 문을 열어 사람을 맞이하며, 앞집에 가서 이웃을 불러오는 일.

이런 평범한 행동들이 한 사람의 몸과 마음을 다시 살아나게 합니다.

회복 33일차.
몸은 밥을 먹고 살아나고,
마음은 사람을 만나 다시 살아납니다.


회복은 특별한 사건보다 평범한 일상 속에 있습니다

오늘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두 시간 동안 산책을 했고, 텃밭에서 깻잎과 호박을 땄으며, 계란말이를 만들고 단호박을 삶았습니다.

엄마에게 커피를 타드리고, 마늘을 까고, 동네 아주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평범한 하루가 지금의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회복의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몸을 움직이며 자연을 만나고,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사람들의 목소리 속에 함께 앉아 있는 시간.

회복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평범한 하루들이 쌓이며 조금씩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한 줄

몸은 밥을 먹고 살아나고,
마음은 사람을 만나 다시 살아납니다.


함께 생각해 보면 좋은 질문

  • 기운이 없을 때 가장 먼저 나를 다시 일으켜주는 음식은 무엇인가요?
  • 나의 작은 취향을 기억해주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 오늘 내가 먼저 안부를 물어야 할 사람은 없는지요?
  • 부모님의 하루에 사람을 만나는 시간이 충분한가요?
  • 평범한 일상 속에서 내가 발견한 회복의 순간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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